posted by DdaDdaSsij 2019. 7. 5. 00:58

오랜만에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 관련 글을 올립니다. 그래도  달에 1편은 보고 리뷰를 써야지 생각했는데, 유튜브 시작하면서 바빠져서 그러지 못했네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종종 넷플릭스 콘텐츠로도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인 ‘나의 마더’는 넷플릭스의 장점으로 볼 수 있는 독특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영화입니다. 인류가 멸종하고 로봇이 첫 인간을 성장시킨다는 설정 자체가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설정은 많은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전에 이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가 오고 가는 몇 가지에 대한 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의미 그대로 ‘나의 엄마’라고 해석한 것이 아닌, ‘나의 마더’라는 한글 제목은 괜찮은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엄마라는 단어를 영어로 표현하여서, 의미는 같지만 약간 이질감이 드는 느낌의 제목이 탄생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제목은 영화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차원에서 잘 지어진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나는 엄마다’라는 표현이 조금 더 맞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굳이 제목 해석을 이렇게 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엄마다’라는 제목 자체가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고, 주인공이 엄마가 되는 것보다는 주인공이 누구에 의해 인간적인 면모를 가지게 되었는지도 조금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미 [아이 엠 마더]라는 영화가 존재하는 것도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엄마다’라고 해석하는 사람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더’라는 제목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2.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다른 여성이 마더가 이전에 키우던 딸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더가 여성에게 엄마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죠. 여성의 나이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봤을 때, 이 사건이 일어난 시점인 인류가 멸망한 지 38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인류가 멸망 후 처음으로 만들어진 인간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자가 이전에 다른 사람과 있었다고 했고, 몇 년 전에 광산에서 도망쳐 나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전부터 생존하고 있었던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을 만드는 곳이 여러 곳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컨테이너에서 두 인물이 나눈 대화를 통해 추측해보면, 생존자들이 있던 광산은 상당히 끔찍했던 곳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그녀가 로봇이 아닌 사람과 함께 있으려고 했던 이유는 그녀는 로봇에 대한 거부감이 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는 어릴 적부터 로봇과 함께 살아온 딸이 거부감이 없던 것과는 대비되는 모습입니다.

 

우선, 인류가 사라진 뒤에 처음 만들어진 인간이 여성이라는 점은 성경에서 말하는 이브를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저는 영화가 이브의 상징적인 의미보다는 인간이 스스로 자생할 수 있도록, 즉 본인이 하고 있는 엄마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최초의 인간을 여성을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름조차 없는 이들의 삶은 인간의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엄마라는 로봇을 통해서 교육을 받으면서, 인간성을 갖춰가고 있습니다. 윤리와 철학 같이 인간의 영역으로만 느껴졌던 부분에 대해서도 교육을 받습니다. 이러한 교육은 영화 후반에 등장하는 로봇의 목적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영화의 결론은 이 모든 일은 로봇의 의도라는 것입니다. 외부 세계의 분쟁 또한 로봇의 의도였던 것이고, 세상 모든 일이 한 인공지능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의도는 간단합니다.

인간들에게 존재하는 존엄성 혹은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을 하는 인간 혹은 내란을 일으키거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다수에게 피해를 입히는 인간들을 모두 없애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만으로 세상을 만들겠다는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산다면 세상이 편할 것이라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다 같이 잘 벌고, 다 같이 잘 살며, 모든 일에 다 같이 나서서 함께하는 세상은 말만 들으면 참 좋은 세상 같이 들립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세상과 비슷한 세상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가는 자유주의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침해되는 개인이 희생되는 것보다는 개인의 가치와 자유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상의 충돌이 영화 속에서 대립되어 보입니다. 

하나의 지휘체계를 통해서 모든 로봇들이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움직이는 모습과 두 명의 인간이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상대방을 설득시키기 위한 과정을 가치는 모습은 현재까지도 대립하고 있는 두 가치의 가치적인 대비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영화는 마치, 마더가 새로운 사람의 등장이라는 변수를 예측하지 못한 것처럼 영화를 전개시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들은 이미 계획되어 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대사도 그렇지만, 애초에 사회의 전 시스템을 통제하고 있던 마더가 한 여성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할 수는 없는 일이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딸이 이런저런 기기를 만질 때의 기록이나 권한 부여 등은 충분히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즉, 의도적으로 다른 여성을 등장시킨 것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여성을 등장시키게 된 것일까요?

백문이 불여일견. 바로 직접 체험을 하게 해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딸도 인간의 윤리적인 판단 그리고 가치의 충돌 등 돌발적이 상황에서 무엇을 중점에 두고 판단해야 할지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직접 사람을 마주한 적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점을 한 여성의 등장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과의 가치적인 충돌이 일어났을 때 생기는 상황에 대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딸이 그녀를 믿고 떠났지만, 그녀의 말은 거짓말이었고 딸은 자신의 집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이런 부분은 그동안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던 마더에 대한 배신감으로 집을 떠난 딸이, 그녀의 말도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더는 딸에게 자신을 파괴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마더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라진 것 같은 행동을 보여준 것이죠. 그렇게 되면, 딸은 더더욱 스스로를 믿고 자신이 가르침을 받아온 그대로를 자신의 동생에게 알려줄 것입니다. 혹은 더 많은 인류를 탄생시켜서 자신이 받은 가르침을 전파할 것입니다. 

그 가르침을 처음 준 것은 마더라는 로봇입니다. 결국, 딸은 자신이 스스로 해낸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딸은 로봇에게 교육을 받은 내용을 전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경험했던 것처럼 외부의 어떤 사람이 등장하더라도 그 사람을 100% 믿는 것이 아닌 충분한 의심을 가지고, 근거를 통하여 스스로 판단을 하여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이고, 그런 과정은 자신의 생각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갈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로봇은 자신의 노동 없이도 많은 인간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전파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상당히 효율적인 방법이 된 것입니다.

이점은 사상의 교육 혹은 세뇌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도 있습니다. 사상이라는 것은 각 개인의 잠재적인 기억이나 경험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한 인간의 모든 경험을 통제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사상 또한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살아오면서 겪었던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이념, 신념 등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의 사상이 옳고, 누구의 이념이 더 뛰어나지 않으며, 어떤 사람의 신념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런 개개인의 사상을 지켜주는 것이 바로 자유주의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유주의 속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것들은 제제하는 장치가 법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고, 타인의 의견을 들으면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두 반영될 수 있는 결과물을 도출하기 위한 과정을 거칩니다. 이런 과정들이 민주주의의 발전을 만들었습니다. 

[나의 마더] 속에 등장하는 두 명의 인물은 서로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여자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딸을 인질 삼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진짜로 인간 같은 모습을 보이던 캐릭터는 누구였는지를 생각해보면, 영화는 더욱 흥미롭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여자와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며, 마치 설득을 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마더’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모습과는 전혀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봤습니다. 인간적인 면은 교육을 통해서 길러질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죠. 영화가 보여주려는 내용 또한 이런 내용의 일부라고 생각해봅니다. 어릴 때부터 철저한 교육을 통해 자라난 딸과 하루하루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버텨온 여자의 모습을 통해서 자라온 환경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인 의심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하는 의심의 종류는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자가 하는 의심은 배척에 가깝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딸이 하는 의심은 경계입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고, 의심하고 정확한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이상적인 인간이라고 한다면,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을 통해 사실을 기반으로 한 주장을 펼치는 사람입니다.

 

딸은 여성이 말하는 모든 말을 100% 믿지도 않고, 마더의 말을 100% 믿지도 않습니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이 직접 확인한 것에 대해서만 믿음을 가집니다. 마더의 입장에서도 딸에게 이런 모습을 원했을지도 모릅니다. 오로지 자신의 신념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닌 의심이 드는 것에 대해서는 확인해보고, 움직이려는 자세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 기지를 발휘하는 것 마지막으로 책임감을 확인하려고 했던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딸을 인질로 잡았던 그녀와 달리, 빠져나가는 과정 속에서도 자신의 동생을 생각한 딸은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아마, 마더가 가지지 못했던 모습을 마더에게 교육받았던 내용을 응용하여, 스스로 성장한 딸의 모습은 상당히 인상 깊은 대목입니다.

 

 

영화 [나의 마더]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라는 타이틀에 적합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오락적인 재미만을 두고 이 영화를 본다면, 그리 재미있는 영화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 보여주는 상상력은 기존 영화들에서는 보여주기 힘든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 영화가 극장의 개봉을 목표로 만들어졌다면 흥행을 위한 재미의 요소들이 더 들어가게 되면서 영화의 본질적인 이야기와 조금 멀어질 수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넷플릭스 콘텐츠의 장점은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집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방식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외부의 간섭이 없다면, 감독은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서 다른 사람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콘텐츠가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초창기의 넷플릭스는 이런 실수가 눈에 보였습니다. 하지만, 최근 넷플릭스의 콘텐츠들은 그 균형을 잘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종종 이상한 작품들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감독이 보여주고 싶어 하는 메시지 혹은 개성들은 잘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넷플릭스 또한 그러한 콘텐츠에 힘을 실어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점이 넷플릭스 콘텐츠를 기대하게 만드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posted by DdaDdaSsij 2019. 4. 5. 18:58

보니와 클라이드를 아시나요?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 연쇄 강도 및 살인을 벌인 유명한 범죄 커플입니다. 이 커플은 아직까지 유명해서 영화나 음악의 소재로 많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1967년에 아서 펜 감독의 대표작인 [보니 앤 클라이드]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이름으로 개봉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많은 영화, 드라마에서 그들의 이야기가 사용되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스토리가 매력적이라는 거겠죠.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보니와 클라이드를 좋아했고, 장례식에도 2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찾아갔다고 합니다. 사람을 죽이고, 강도 짓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좋아하니, 정부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골칫거리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잡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강구합니다. 그리고 전직 텍사스 레인저스였던 두 사람을 데려오게 되는데, 그 두 사람이 프랭크 해머와 매니 골트입니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넷플릭스 영화가 [하이웨이 맨]입니다.

 

 

[하이 웨이 맨]은 공개 전부터 보니 앤 클라이드를 잡으려는 경찰의 이야기라는 점과 케빈 코스트너와 우디 해럴슨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기대를 했던 작품입니다. 거기에 [블라인드 사이드]과 [파운더]를 연출한 존 리 핸콕 감독의 연출 또한 기대가 되는 작품이었습니다. 한동안 넷플릭스 영화들을 안 봤는데, 오랜만에 보고 싶게 만드는 작품이었습니다. 덕분에 오랜만에 넷플릭스 영화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선, 이 영화를 보기 위해서 보니 앤 클라이드 이야기를 아셔야 할 것입니다. 자세하게는 아니더라도 그들의 이야기를 모르는 분들은 아마 없으실 겁니다. 모르시더라도 영화에서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물론, 영화를 보고 보시면 더욱 재밌을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보니와 클라이드는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저, 인물의 대화나 누군가가 목격하는 장면으로만 등장합니다. 추측하건대, 보니와 클라이드의 이야기를 모른 상태로 영화를 본다면, 조금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다 본 뒤에 그들의 이야기가 다시금 궁금해질 것입니다. 이미 보신 분들이라면, 보니와 클라이드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영화 자체가 옛날 영화라는 느낌이 듭니다. 기본적으로 서부극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이 영화는 [보니 앤 클라이드]를 염두에 두고 찍은 것이라는 생각이 많이 드는 영화였습니다. 영화에서 그 점을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으나, 보니와 클라이드 하면 가장 대표적인 영화이기도 함과 더불어 뉴 아메리카 시네마라를 영화 사조 상으로도 이 영화는 상당히 의미가 있는 영화이기 때문에 감독이 영향을 안 받았다고 할 수가 없는 영화입니다.

그래서 [하이 웨이 맨]은 뉴 아메리카 시네마(아메리칸 뉴 웨이브 시네마)의 성격을 잘 따르고 있습니다. 눈을 굴리듯이 천천히 밀고 나가면서 이야기를 키워가고 있습니다. 영화 자체도 보니와 클라이드를 잡는 이야기 외에도 그들을 잡으려고 하는 나이 든 레인저스 두 사람의 이야기도 충분히 보여줍니다. 그 이야기 또한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는 보니와 클라이드를 잡은 은퇴한 두 노인의 이야기입니다. 영화에서도 이 두 노인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 누구보다 보니와 클라이드에게 가장 근접하게 됩니다. 이 대목에서 [하이 웨이 맨]은 단순히 보니와 클라이드를 쫓는 수사 극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영화 속 두 인물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치열한 젊은 시절을 보냈고, 그것에 대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노련한 그들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해도 우아하고 품격 있는 두 배우의 모습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인생의 굴곡들이 이 영화에도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 영화는 상당히 클래식한 영화입니다. 영화 스타일, 배경, 캐릭터의 나이까지 많은 시간이 지난 것들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느껴지는 말로 표현 못 할 느낌이 있는데, 이 느낌은 영화를 보시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보니 앤 클라이드] 하면 그들이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이 가장 유명할 것입니다. 때문에 이 영화에서도 그 최후의 장면에 상당히 기대가 되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상당히 좋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장면 이후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도 상당히 좋았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자세히 말씀드리지는 못하지만, 인물들이 느끼는 씁쓸함, 혹은 회환 같은 장면이 등장하는데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인물의 고뇌가 많이 표현된 영화입니다. 두 인물의 왜 고뇌를 해야 하며, 굳이 나서서 하려는 이유와 마지막에 다다라서 그들이 웃지 못하는 이유까지 같이 생각해보면, 영화가 상당히 많은 것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3.5 / 5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한 그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