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그 일 이후, 서대문 형무소의 감옥 8호실에 새로운 죄수가 들어옵니다. 그녀의 이름은 ‘유관순’. 3평도 안되는 그곳에는 수십 명의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3월 1일, 그 날 이후의 1년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입니다. 영화 [항거 : 유관순 이야기]입니다.
영화에서 역사적 인물을 다룬다는 것은 상당히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같은 날 개봉한 [자전차왕 엄복동]은 혹평을 받고 있고, 가장 유명한 영화인 [명량]은 좋은 성적을 거두기는 했지만 과도한 국뽕 논란이 있었습니다. 한국 영화 중에 실존 인물을 가장 잘 다룬 영화는 [동주]라고 생각합니다. 건조한 시대에 살던, 건조한 인물의 쓰는 감성적인 시라는 아이러니를 낳을 수밖에 없는 당시 상황을 설득력 있게 보여줬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도하지 않고, 호소하지도 않습니다. 이 영화도 [동주]와 비슷한 느낌을 보여줍니다. 흑백에 살짝 건조한 영화의 톤, 그리고 덤덤한 연출까지 그렇습니다.
이 영화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영화가 신파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영화도 유관순이라는 인물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끼치는 영향력 그리고 그녀의 인간적인 모습에 조금 더 집중합니다. 영웅 신화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유관순이라는 인물만이 아니라, 향화, 애라, 옥이 그리고 니시다까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인물을 통해 당시에 사람들의 다양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다른 영화들과 가장 다른 점은 독립운동을 다루는 태도입니다. 대부분의 일제 강점기를 다루는 영화에서는 한국 독립군과 일제를 양 대척점에 두고 있습니다. 혹은 친일 행위에 대해 감정적인 태도를 보여줍니다. ‘한국 사람은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 하지 않은 사람은 다 나쁜 사람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항거 : 유관순 이야기]는 그런 자세를 취하고 있지 않습니다. 한 인물을 빛내기 위해서 추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낮추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이런 자세를 볼 수 있는 장면은 1920년 3월 1일에 만세를 외치기 위해 돌아온 유관순의 태도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유관순은 만세 운동을 위해 동지들에게 설명을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번 만세 운동은 자율에 맡기겠습니다
저는 이 영화에서 이 대사가 가장 기억에 남았습니다. 이 대사는 유관순이라는 인물이 변화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고,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도 불의를 당하고 있지만, 자신의 처신 때문에 혹은 피해를 받을까봐, 기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불의에 나서서 바꾸려고 하고, 도와주려는 사람을 칭찬해야 하는 것입니다. 친일을 비난하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했다고 비난을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유관순 스스로도 그런 점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행동 때문에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가족을 잃는 피해를 받았습니다. 그런 피해가 자신이 만세 운동을 했기 때문이라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죄책감 때문에 힘들어하는 그녀의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반성은 만세 운동을 조금 더 의미 있게 만들었습니다. 영화의 후반부에 그녀는 하지 않았던 것에 후회하는 것은 싫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의 행동 때문에 누군가가 피해보는 것을 괴로워하던 유관순이 후회가 싫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 만세 운동을 다시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달라졌습니다. 아까 말했던 대사가 이 상황에서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번 만세 운동은 자율에 맡기겠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들이 만세 운동에 참여합니다. 누군가가 시켜서 하는 만세 운동이 아닌 본인 스스로 선택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빛이 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관순이 몰랐던 사실이 있습니다. 이전에 했던 만세 운동도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닙니다. 서울에서 아우내로 만세 운동 소식을 가져왔던 그녀의 행동에 자발적으로 동참한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비난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비난할 수 없습니다. 강압적인 일제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조선인으로 살겠다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독립투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 영화를 보고 뜨거워지는 무언가를 느꼈다면 여러분도 그들과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고, 모든 분들이 독립지사일 것입니다.
4 / 5 참지 못한 것이 아니라, 참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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