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들인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 영화의 소재인 ‘다도’ 역시 시간을 들이는 일입니다. 일상에서 차를 마신다는 것은 간단한 행위입니다. 뜨거운 물에 차를 우려서 마시면 됩니다. 일반 카페에서는 그 우려 주는 과정 또한 다 해서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마시기만 하면 됩니다. 이렇게 간단하게 차를 마실 수 있음에도 아직까지 다도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다도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차를 마시는 것을 넘어서 그 행위에 시간을 들이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의미가 궁금하다면 이 영화가 그 답이 될 것입니다. 영화 [일일시호일]입니다.
이 글에는 영화 [일일시호일]의 약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이야기 전개상 결말이 크게 중요한 영화도 아닐뿐더러, 알고 봐도 영화의 흥미를 저해시키지 않습니다. 그냥 보셔도 상관없으나 그럼에도 스포일러가 영화를 관람한 후에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영화 [일일시호일]은 최근 우리의 곁을 떠난 키키 키린 배우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그녀의 유작인 만큼 이 영화는 그녀를 좋아하는 팬들에게는 남다른 의미가 있는 영화일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의 내용 역시 그녀가 주인공의 스승 같은 존재가 되어서 나옵니다.
이 영화의 대부분의 내용은 인물이 다도를 하는 행위를 보여줍니다. 주인공인 노리코가 다도를 배우면서 살아가는 인생의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노리코가 살고 있는 도시와 다도는 대조적인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도시의 생활은 개인이 단체에 시간을 맞춰야 합니다. 정해져 있는 시간에 도착하는 열차나 버스를 타야 하고, 개인차를 운전하거나 걸어 다녀도 신호등 신호에 맞춰서 건너가야 합니다. 이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정해진 약속 안에서 움직입니다. 그에 비하면 다도는 스스로에게 투자하는 시간입니다. 차를 마시기 위함보다는 그 차를 마시기 위한 과정에서 자신에게 여유를 가지는 것이죠. 우리가 여행을 가기 전에 여행지를 찾으면서 짐을 쌀 때가 행복한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도라는 것을 배우는 과정은 험난해 보입니다. 지켜야 하는 규칙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다다미 한 칸에 정해진 걸음수가 있고, 손수건 하나도 접는 방법이 따로 있을 뿐만 아니라 상황에 맞는 손수건 사용법도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규칙 속에서 차를 마셔야 하는데 이것이 과연 여유 또는 힐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영화 속 노리코는 자의가 아닌 권유로 다도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녀가 학생일 때 시작한 다도는 성인이 되어서도 다도를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같은 것을 하다 보면 보이게 되는 것들이 있다고 합니다. 영화 속에서 예를 찾자면, 물소리를 알 수 있습니다. 따뜻한 물을 따르는 소리와 찬물을 따르는 소리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점이 영화에서 가장 크게 느껴졌습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익숙하다는 것은 지겹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그것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항상 똑같은 것을 반복하게 되면 사소한 것만 달라져도 그 변화가 쉽게 눈에 들어옵니다. 때문에 그 변화가 느껴질 때, 새로운 것을 발견한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것을 영화는 물소리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다도를 행할 때에 느껴지는 물소리뿐만 아니라 계절마다 들리는 빗소리도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여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단순히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익숙함 속에서 새로운 것들을 느끼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소소한 행복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노리코의 행동들이 조금 더 이해가 됩니다. 영화 속에서 노리코가 시험을 보기 전날이 있습니다. 이 날은 시험공부를 위해서 다도를 쉽니다. 하지만, 노리코는 늦은 시간에 다도를 위해 선생님의 집을 찾습니다. 다도는 그녀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왜 다도를 하는 것일까요? 일상의 의식 같은 존재가 된 것인지, 혹은 그 차를 마시는 것을 좋아하는 것인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좋은 것인지. 분명한 것은 위의 행동들은 다도를 하면서 새롭게 얻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도를 하지 않았다면 몰랐던 것들이죠. 노리코에게 다도는 무엇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다도는 노리코에게 큰 버팀목이 되기도 합니다. 영화 속 노리코는 현실의 청춘을 대변하기도 합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취업 걱정을 합니다. 사실, 취업 걱정보다 더 큰 것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전 이 부분이 상당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이미 진로를 선택했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겠다는 목표와 의지가 있고 그것에 흥미가 있습니다. 적어도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제 주위에는 이것을 찾지 못한 친구들이 너무 많습니다. 나이의 문제를 넘어서는 고민입니다. 그것을 찾지 못하는 청춘들이 많기 때문에 남들 하는 것들을 따라 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해보면 자신이 흥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입니다. 영화 속 노리코도 그렇습니다.
노리코는 취업에도 실패하고, 연애에도 실패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이죠. 노리코의 인생을 노리코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다도라는 지지대가 있던 것입니다. 최소한의 지지대가 있기 때문에 자신이 다른 곳에서 실패를 해도 돌아갈 곳이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는 시작점이 있다는 것이죠. 제가 영화 [리틀 포레스트(한국판)]를 보면서 느낀 점이 바로 이 점입니다. 영화 속 주인공인 혜원이 취업과 사랑에 실패하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자신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한 준비를 합니다. 내가 실패해도 도망칠 곳이 있다는 것은 마음의 큰 위안이 됩니다.
어떤 무언가가 인생의 전부가 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것이 없어졌을 경우에 그 사람에게 오는 좌절감이나 절망감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저는 스스로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라고 주변 사람에게 말합니다.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을 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을 만들라고 합니다. 이 영화 속 노리코에게는 다도가 그런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배운다고 하지만, 사실은 다도를 즐기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가장 화룡점정은 영화의 마지막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의 마지막 대사가 가장 마음에 듭니다. 노리코에게 다도를 가르치는 다케타 선생님은 노리코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다도를 가르쳐보는 건 어때요? 가르치다 보면 배우는 것도 많아요.”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행위는 배우는 것의 가장 큰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알려주는 것은 상당한 책임이 따르는 일입니다. 때문에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조금 더 견고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저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것보다 누군가를 가르치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곤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할 때 몰랐던 것을 타인을 통해 알게 됩니다.
노리코는 영화 속에서 스스로를 센스가 없고,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오히려 꾸준하게 다도를 배울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노리코의 친구인 미치코는 노리코에 비해 비교적 센스도 있고, 눈치가 빠른 인물로 나옵니다. 마치코는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일에 대해 적극적이기도 하고, 자신의 일에 대한 결정도 빠른 편입니다. 때문에 그녀는 배움의 속도도 빠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코는 다도를 꾸준히 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노리코는 그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꾸준하게 다도를 해왔던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다도를 배웁니다. 차 한잔 마시는 것을 20년동안 배운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한 가지를 꾸준히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가진 성격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에게 가장 큰 버팀목이 되어주었고, 그녀에게 새로운 삶을 주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할 이야기가 많아지는 영화입니다. 시사회 후 진행된 GV에 따르면, 이 영화를 본 2030대 여성분들이 많은 공감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남성분들이 봐도 충분히 공감할 내용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모 세대에게는 현재의 청년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영화 속 노미코의 청년 시절을 보면 저도 많은 공감이 되었습니다. 제 주변에도 많은 친구들이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 노미코에게 그리고 청년들에게 다도는 어떤 존재였는지 생각해보면 영화가 더 깊게 스며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노미코에게 다도 같은 존재가 자신에게도 존재하는지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그것을 찾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 / 5 소소하지만 절대 소소하지 않은, 다도 속 인생의 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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